물안개에 싸인 감곡성당 - photo by 느티나무신부님
천주교의 술꾼들이 가장 좋아하는 기적이 예수님께서 물을 술로 만든 기적이었는데
개신교에서는 왜 술을 못 마시게 할까?
성서에서는 술 먹지 말라고 나온 곳은 없지만 개신교에서는 술을 마귀처럼 볼 때가 있습니다.
100여년 전에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온 파가 청교도들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농사철이 끝나면 겨우내 밀주 담가놓고
술 퍼먹고, 뽀오얀 연기 속에서 화투 치는 것을 보고 그때 선교사들이
‘이러다가는 선교가 되지 않겠다!’
그래서 ‘술과 담배는 마귀!’
그것이 하나의 불문률처럼 내려왔습니다.
술을 마귀처럼 여기는 것도 문제고, 사람이 술한테 먹히는 것도 분명히 문제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가나혼인잔치의 기적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밝혀 주는 내용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첫 번째, 이 사건이 일어난 때를 주시해보면 혼인잔치 때입니다.
혼인잔치라고하는 것은 기쁨을 나타내고, 두 부부가 새로 만난다고 하는
창조를 나타내고, 평화를 나타냅니다.
기쁨은 기적을 낳고, 창조는 기적을 낳고, 평화는 기적을 낳습니다.
예수님은 혼인잔치 때 끝까지 그 집에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엄격하고 근엄해서 흥을 깨트리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지위가 높을수록 많은 경우에 굳어 있는 사람을 많이 만납니다.
굉장히 즐거운 자리인데도 원리원칙을 따지는 종교인이 그 자리에 들어서면 판이 깨어집니다.
자기 혼자만 철저히 금욕적으로 사는 사람이 있고, 그런 크리스천들은
기쁜 자리에 가서도 우울한 그림자만 덮어주고 옵니다.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 우리 신앙인입니다.
‘우울한 성인은 없고 기쁘게 사는 마귀도 이 세상에 없다.’
우리들은 다른 이가 기뻐하는 자리에서 기뻐해야 되고
슬퍼해야 하는 자리에 가서 슬퍼할 줄 알아야 됩니다.
없는 이와 어울릴 때는 그들처럼 살아야 됩니다.
아이들과 어울릴 때는 아이들처럼 단순해야 되고
노래할 때는 노래해야 되고, 춤춰야 할 때는 춤을 출 줄 알아야 됩니다.
술 마실 때는 같이 술 마시는 따뜻한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사랑의 분위기를 깨어서는 안 됩니다.
어느 읍 단위 성당에서 근무할 때 그 당시 군수께서 천주교 교우였습니다.
그 군수와 차를 한 잔 마시는데 그분의 말씀이
"신부님, 저에게는 애로점이 있습니다. 공직에 있다 보니 절에서 하는 행사도 가야 되고,
개신교에서 부를 때도 가서 참석해야 됩니다.제일 힘들 때가 절에서 하는 행사인데 불상이
있는 곳에 다 절을 할 때 저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금으로 치장한 불상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석가모니를 보내주신 하느님을 생각하면서
절을 하십시오. 그 자리에서 성호를 긋는다면 잔치집에서 판 깨는 겁니다.”
천주교신자 군수님인줄 다 아는데 그 앞에서 절을 하면
‘야, 천주교는 역시 포용력이 다르다!’
영혼을 구하려면 밝고 명랑해야 됩니다.
경거망동하거나 허풍을 떠는 수다장이가 되라는 말은 결코 아닐 겁니다.
다정다감하고 따뜻한 마음씨를 가져야 됩니다.
예수님은 그 혼인잔치에서 끝까지 앉아 계시면서 같이 어울리셨습니다.
희노애락을 같이 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셨고,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려고 애를 쓰셨습니다.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십시오.
올 한해도 여러분들 잘난 척 하지 마십시오.
잘나야 얼마나 잘 났고, 배워야 얼마나 배웠겠습니까?
아마추어들은 갈 자리 안 갈 자리 가서도 티를 내고 판을 깨지만 프로들은 다릅니다.
저는 사제로 살면서 참으로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지위가 있는 사람, 없는 사람, 잘난 사람 병든 사람 건강한 사람.....
만날 때마다 내가 사제라는 것 때문에 어떤 자리에서든지
분위기가 깨어지지 않도록 무던히도 애를 쓰고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혼인잔치에서 끝까지 함께 하시면서 기적을 일으키신 겁니다.
두 번째로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주목해야 합니다.
이 사건은 갈릴리 어느 마을의 보잘 것 없는 어느 한 가정에서 일어났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 집에서 기적을 못 찾는다면 이 세상 어디 가도 기적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은총의 불감증에 걸려 있습니다.
은총의 불감증 환자들의 대표적인 특징은 은총을 찾아 헤맵니다.
은총은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와 있는 은총을
겸손하게 발견하고, 고백하고, 봉헌에 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내 집에서 은총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내 집에서 기적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기적은 이 세상에도 없습니다.
‘내가 은총덩어리로 살고 있구나!’ 하고 느끼는 것이 바로 피정이지요.
주님께서 하신 첫 번째 기적은 사람이 많이 모인 회당에서가 아니라
평범한 가정에서 첫 기적을 일으키셨다는 겁니다.
어느 성인이 그런 얘기를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지극히 가정적인 분이시다!
이렇게 은총덩어리로 가득 차 있는 가정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다른 여자에게는 인기 만점인 사람이
집에서는 얼마나 아내에게 혹독하고 모질게 구는지 모릅니다.
성당에서도 성당 자매들에게 ‘짱’ 소리 듣는 남편을 둔 그 자매를 보면서
‘세상에~ 당신 남편 너무 자상하고 멋있어~’
당사자인 부인은 ‘너도 살아봐라!’
약한 사람일수록 가면을 많이 씁니다.
집에 있는 내 꼬라지를 알고 새끼들도 아내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가면을 써봐야 소용이 없으니까 생긴 꼬라지대로 살아갑니다.
일단 문을 열고 나가면 사람들이 나를 보는 시선이 가면을 쓰기 시작합니다.
사람은 안과 밖이 똑같아야 됩니다.
바깥에서 친절하고 인기만점인 사람은 안에서도 아내에게 자식에게 인기가 좋아야 됩니다.
가면을 많이 쓰는 사람일수록 인생이 피곤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진면목은 밖이 아니라 집안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그 사람의 진가가 드러납니다.
나의 좋은 면을 보는 것은 대부분 낯선 사람들이고
나의 가장 나쁜 면을 보는 사람들은 생활을 함께 하는
내 가족이라는 것이 비극적인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장 최선을 다해야 할 장소는 가정이라는 것을 명심합시다.
예수님이 당신 영광을 드러낸 곳이 가정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가정 안에서 예수님을 찾지 못한다면/ 내 식구들 사이에 은총을 확인하지 못한다면
이 세상 어디에 가도 은총은 없습니다.
세 번째,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이유를 주목해야 합니다.
동방에서는 손님을 환대하는 것은 신성한 의무입니다.
만일 혼인하는 날에 포도주가 떨어진다는 것은 그 신랑 신부에게는 한평생
수치로 따라다니는... 따라서 그보다 더 큰 모욕은 없을 겁니다.
예수님은 이 가난한 갈릴리 가정을 수치와 경멸의 상태에서
구해주셨다는 것이 바로 이유입니다.
소박한 사람들의 동정과 이해심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하고 보잘 것 없는 경우에도 큰일을 행하셨습니다.
세상에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오히려 즐거워하고 떠벌려서 좋은 화제로
삼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예수님은 비천한 갈릴리아의 젊은 남녀를
수치와 경멸에서 구하기 위해 당신의 능력을 쓰신 겁니다.
마지막으로 성모님의 모습을 묵상합시다.
예수님의 입에서
“그게 어머니와 나와 무슨 상관있습니까? 제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엄마 입장에서는 당연히 서운했을 겁니다.
성모님은 이해하지 못할 때는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거절하는 예수님을 이해할 수는 없었어도, 성모님은 아들을 믿었던 겁니다.
예수님 잉태할 때도 그러셨고, 만신창이가 된 아들을 껴안을 때도
내 아들이 왜 이렇게 죽어야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러나 성모님은 신뢰했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시고자 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가 무엇인가 옳게 처리하리라고 하는 것을
확신하고 아들을 믿었던 겁니다.
인생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가는 길을 알지 못하고 암담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고 없이 닥치는 사건의 이유와 의미를 대부분 알지 못합니다.
이때 우리는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오늘 가나안 기적은 술의 기적이 아닙니다.
첫 번째, 모든이의 모든 것이 될 때 생기는 기적입니다.
두 번째, 가족들에게 최선을 다할 때 생기는 기적입니다.
세 번째, 조건 없이 베풀 때 생기는 기적입니다.
네 번째, 성모님처럼 무조건 예수님을 신뢰할 때 생기는 기적입니다.
포도주가 성혈로 변합니다.
개신교에서는 어떻게 포도주가 성혈로 변하느냐!
성체성사를 부인합니다.
그럼 물이 어떻게 포도주로 변했습니까?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하느님의 능력이 포도주를 성체로 못 변화시키겠습니까?
물이 포도주로 변한다는 것은 영적변화입니다.
성체를 영할 때마다 신앙생활이 한 해 한 해 변해야 됩니다.
변화는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고백해야 됩니다.
봉헌해야 됩니다.
오늘 가나안 기적은 단순히 물이 포도주로 변화는 물리적인 기적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 변화를 요구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임을 명심합시다. 아멘
-느티나무 신부님 글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