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 가까이로
나를 부르셔서 다가갔습니다.
절벽 끝에 더 가까이 오라고 하셔서
더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랬더니 절벽에
겨우 발을 붙이고 서있는 나를
절벽 아래로
밀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나는
그 절벽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내가 날 수 있다는 사실을
로버스 슐러의 '절벽 가까이로 나를 부르셔서'라는 시를 소개하며 말문을 열게요.
어! 신부님이 달라졌다,젊어지셨네(일주일 새 갈색머리가 되셨다?). 일찍 오셨는지 주임신부님의 소개에 여유있게 우뢰와 같은 박수를 휙휙 제끼며 제대를 향하여_____. "기다렸어요?"라는 물음으로 시작된 강론.어째 더 럭셔리해지고 부드러워지신 것 같다는 느낌.
오늘의 주제는 '십자가와 삶의 고통'. 오늘은 똑똑히 들었답니다. 40~50 그 근방이라고 연세를 밝히신 신부님은 감히 어르신들 앞에서 어불성설의 누를 끼칠까 되려 조심스럽다고 하셨어요. 주제가 주제인지라------.
우리는 삶의 여정 속에서 십자가에 대해 부정적인 이해(거부,외면,합리화,속수무책)를 하고 산다고 전제하시고, 세 가지로 십자가의 의미를 정리해주셨습니다.
첫째, '~가(이) 없었다면 행복했을텐데------.' '~때문에 내 인생이 망가졌다.'는 관점. 사실은 그렇지 않답니다. 고통이 너무 벅차고 힘들지라도 인생 전체로 보면 하나의 점이요 부분일 뿐이라고 해요.그런 호들갑은 부분을 전체로 동일시하는 오류라네요.
둘째, '왜 하필 나만'이라는 원망과 불평. 우리가 사는 모습은 비슷해서 고만고만한 아픔과 문제가 꼭 나만의 고통이 아닐진데 나만 그런 것처럼 착각하는 오류 속에 우리는 오늘도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신부님이 리바이벌이라고 그냥 지나간 '고속도로 터널 이야기' 해드릴게요. 신부님께서 언젠가 터널을 통과하는데 입구가 거의 보이는데도 캄캄하더래요.
"공무원들 뭐야? 공사를 이따위로------." 운운하며 터널을 다 빠져나왔는데도 계속 어둑해서 보니까 글쎄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던 것이었답니다. 뼈아픈 (?)신부님의 경험담을 통해 이제 우리는 속단하는 나쁜 습관을 버리기로 해요.
셋째, 우리는 자신의 방식대로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자기의 십자가를 변화시키고 왜곡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객관적 인식없이, 고통의 의미에 대한 성찰없이, 하느님께 간구하지 않고 말이지요. 그러나 삶의 십자가는 누구도 예외없이 벗어날 수 없는 것이고, 양면성으로 우리 삶을 이끌어가는 것이라고 해요.
고로 우리네 인생이란 십자가의 연속이렸다. 아기가 우는 것도 과학적으론 태내에 있을때와 호흡 체계가 달라서 기도를 열기 위해 우는 것이라 하더라도, 편안하고 고요하게 지내다가 갑자기 세상에 나와보니 깜짝 놀라서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시작부터 당혹스럽고 힘든 경험을 한다는 거.이로써 행복 끝 불행 시작.
사춘기는 어떤가. 그 전에는 희미했던 성적 정체성이 호르몬의 적극적인 분비로 인해 남,녀로 뚜렷한 사고와 심성이 형성되는 시기니 어찌 힘들지 않으랴. 질풍노도와 같이 반항하는 것도 순리이거늘. '나도 힘들다'는 에두른 표현인 것을------.
결혼도 또한. 콩깍지가 벗겨지고 갈등과 혼란 속에서 '애'가 생겨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게 그 것. 혼인반지는 그래서 요런 상징성이 있다나. 첫째, 앞으로 '나'는 없다. '우리'만 존재한다. 둘째, 불편하고 희생이 요구되더라도 사랑의 표지로 받아들이자. 셋째, 부부일심동체어니 맘대로 간섭하고 요구할 권리와 책임이 있다는, 로맨틱과는 쬐끔 거리가 있는 뜻이라는 겁니다..
갱년기도 대부분 부정적인 게 일반적. 남성은 예전과 달리 여성호르몬이 분비되는데, 이걸 희화화하는 표현들이 넘쳐나는데, '젖은 낙엽'(내가 읽은 어떤 책에서는 이말이 일본에서 시작되었고 '누레오치바'라고 한다고 한다.)이라는 말은 이 시기의 쪼잔해지는(신부님의 리얼한 표현일뿐)남성들을 지칭하는 대표적인 유머? 반면 여성들은 남성호르몬이 나와 더 용감해지고 통이 커진다고 해요. 이는 어쩌면 조화롭게 융화되어 완성된 인격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신의 섭리가 아닐까~~~요.
죽음에 대해 말씀하실 땐 이청준 원작의 '축제'(안성기 주연)이야기를 예로 들어주셨어요. 부모의 장례식이 뿔뿔이 흩어져 살던 가족의 화합의 장이 되었으니 죽음이 축제 아니겠는가고. 고로 죽음이란 원하지는 않았지만 태어나서부터 죽는 그 순간까지 한순간도 고통이지 않은 순간이 없었음을 주님께 명확하게 알리고 고백하고 확인하는 순간이라는군요.
순간 저는 몇년 전 아이들과 수업하면서 보았던 그 영화가 오버랩되면서 송골이 묘연해지고 소름이 끼칠 정도로 멍해지더라고요. 그게 죽음이란 말이지, 멀리 있는 것도 같고 아주 가까이 있는 것도 같은 죽음의 이미지를 어쩜 이 신부님은 이렇듯 명쾌하게 단칼로 내리치 듯 결론을 내린단 말인가. 언어의 마술사란 이런 때 쓰는 말이구나.
그럼 부정적으로만 보았던 십자가에서 우리는 어떤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을까. 첫째는 아,본래 내 것은 하나도 없었구나. 둘째는 원래 인생은 내뜻대로 되는 게 아니구나. 이게 인생의 화두로구나라고 깨닫는 바로 그 것이랍니다.
고통(십자가)은 다른 말로 하자면 '위기' 라 할 수 있는데, 고통 앞에서 우리는 전과는 뭔가 달라져야 하는데 변화가 두려워서 새로운 것으로 가기 싫다고 뻐팅기는 게 우리들의 자화상. 하느님께서는 고통을 통하여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요구하며 그것이 바로 십자가 구원의 의미라고 하셨습니다.(아멘)
다음에 이어진 신부님의 파란만장한 고백. 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한 과거사.
아들과 같이 미사 보는 게 소원이었던 엄마와 마지못해 동행했던 길에서, 자신의 자전거 뒷자리에서 떨어져 바로 돌아가신 어머니. '에미 잡아먹은 놈'이라는 죄책감에 대인기피증에 시달리고 심장이 뻥 뚫려 바람이 슝슝 드나드는 듯한 황폐한 시절을 보내다 수도원에 입학하게 되었답니다. 피맺힌 육성으로 절절히, 걸쭉한 욕설(?)로 기막힌 고백을 쏟아내실 땐 어떤 숨소리도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우린 완전히 신부님의 불행한 운명에 매몰되어 빠져나오려고 하지도 않았죠. 우리를 그 숨막힘에서 구해낸 건 신부님의 다음 말씀.
그 뒤 인생을 되돌아 보며 어머니의 돌봄과 정성, 희생을 통하지않고 내가 존재할 수 없었구나를 깨닫고, 첫미사 때 어머니를 위해 봉헌하려 했는데,오히려 감사기도를 올렸다고 해요. 어머니는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고 나보다 더 잘 계시는구나 그제서야 상여를 붙들고 있던 집착과 영적교만으로부터 자유롭게 변화될 수 있었답니다.
우리는 흔히 자녀를 위해 고생하고 희생한다고 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자녀를 향한 속썩음 때문에 빗나가지 않고 기도하며 사랑에 눈뜰 수 있으니 자녀가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자녀들에게 "네가 있어 축복이고 은총이야"라고 말해본 사람 손들으라고 하셔서 저는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근데 쫌 쑥쓰럽더라구요. 어찌보면 당연한 걸 무슨 손까지 들고------. 그렇다고 번쩍 손든 나도 유치찬란?
어머니 돌아가시고 가세가 급기울어 엄청 고생을 하셨는데 오히려 가난 속에서 풍요로움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평화, 감춰진 여유, 더 큰 기쁨을 만끽하고 더 진실하고 단순하게 나눔의 삶을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고통이 찾아와 아플 때는 그냥 아파하며, 십자가를 보면서 진실로 하느님께내 아픔을 봉헌해야 한다 합니다.그 안에 엄청난 변화의 기쁨이 있는데 그제서야 내가 왜 이 아픔을 감당해야 하는지 받아들이게 되고, 그래서 고통은 그분을 닮아가려는 삶의 여정 속에서 꼭 필요한 삶의 초대장이라네요. 어쩌면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팔자' 로 여기며 사는 사람들 아니겠느냐고요.
동남아에 쓰나미가 닥쳤을 때 잠수부들의 증언에 의하면 살짝 순간적으로 '쏠림'이 있었던 것 외에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합니다.길가에 있을 때 차가 지나가면 순간 휘청했다 제자리로 돌아오 듯 우리에게 고통은 그런 것.
고통을 잘 이겨낸 후에는 휘돌리지 않는 빛이 되어 다음 삶을 향한 여유와 담대함과 평화가 특별 보너스로 주어진다는 말씀으로 사자후를 토해내신 두 번의 특강은 끝났습니다. 가슴이 먹먹하고 촉촉하고------. 얼른 일어나지 못했어요. 깊은 울림 때문에 팍 일어서면 넘어질 것 같았거든요.
신부님 열강에 감사드리고 이런 기회를 마련해 주신 주임신부님께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