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티의 가을 - photo by 느티나무신부님
†찬미예수님
오늘 일기예보가 북쪽지방에 비가 내릴 확률이 높다고 해서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이 성지에는 미사 드릴 장소가 여러 군데 있습니다.
300 여명 들어가는 대성당이 있고, 100 여명 들어가는 소성당이 있습니다.
야외에서 미사 드릴 곳도 몇 군데 있지만 비가 오고 추우면 갈 곳이라고는
500 여명 들어가는 조립식 건물인 강당이 하나 있었어요.
그 강당을 조금 넓히는 작업을 하다가 어저께 불이 나서 모두 타버렸습니다.
다행히 순례자들이 거의 다 가서 인명피해는 없었어요.
불나는 것 보면서 주교님께 보고를 올렸습니다.
“주교님, 주교님도 창고 같은 건물 보시고 오가시면서 마음 언짢으셨을 텐데
리모델링하다가 불난 것, 성령의 불로 알고 근사한 성당 하나 지어야겠습니다.
주교님, 허락해 주십시오.
“신부님, 가신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대성당을 짓습니까?”
“그건 상관이 없으니 허락해 주십시오.”
“그럼 신부님, 계획서를 작성해서 보내주십시오.”
1500명 정도 들어가는 성당이 지어지면
비가 오건, 눈이 오건, 사람이 1500명이 오건...
이제는 미사 할 장소, 기도할 장소가 있으니까 걱정이 없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오늘이 전교주일
오늘 민족복음화를 위한 미사가 전국 성당에서 드려지고 있을 겁니다.
이 배티 성지에서도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자 합니다.
그리스도교의 특징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그리스도교는 많은 특징이 있는데
가장 큰 특징은 애초부터 찾아나서는 종교입니다.
말을 건네는 종교입니다.
방문하는 종교입니다.
최양업신부님이 일 년에 7000 여리를 걸어 다니시면서 선교를 하셨습니다.
최양업신부님은 자전거를 타고, 오토바이를 타고 전교하신 것이 아니라
걸어서~ 때로는 한 달에 3일 밖에 못 주무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12년을 사제생활하시다가 꽃다운 나이 40에
촛불이 마지막 자기 살을 태우고 스르르~~꺼지듯이
온몸에 기가 다 빠져서 걸어가시다가 쓰러져 돌아가셨습니다.
말이 칠 천리이지~ 서울과 부산을 왕복 세 번 반~~
사제 생활 12년 동안, 84000 여리 길을 짚신을 신고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 오늘 복음처럼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있어야 들을 것이요,’
그 믿음을 가지고 그 험한 길을 다니셨던 겁니다.
이 넓은 천지에 한국사제가 한 분 밖에 없었으니
얼마나 양들이 목자를 그리워했겠습니까?
종부성사를 청하는 사람들은 죽기 전에 신부님 만나야 될 텐데~
회장님에게 교리 배워서 세례 준비하며 사제를 기다렸던 신자들,
죄 속에서 헤매면서 죄 사함을 받고자 고해성사를 기다렸던 전국에 있는
신자들 때문에 최양업신부님은 기를 쓰고 찾아 나섰던 겁니다.
그리고 끊임없는 방문을 하셨던 겁니다.
그리스도교는 본질 자체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종교가 아니라
기를 쓰고 찾아 나서는 종교입니다.
창세기에 아담 하와가 죄를 짓고 난 다음에
그 죄의식 때문에 숨어있는 것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찾아오십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찾아오십니다.
두 번째로 하느님께서 아담을 찾아가서 말을 건네셨습니다.
세 번째는 대화를 시도하셨습니다.
네 번째는 나누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죽옷을 입히십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방문하는 최종의 목적은 치유입니다.
규칙을 어겼기 때문에 낙원에서는 내보내셨지만
성서는 태초부터 하느님이 인간을 방문하는 모습으로 나옵니다.
예수의 강생 역시 방문이십니다.
성자께서 죄지은 인간을 찾아 나서신 겁니다.
만일 그분께서 저 거룩한 하늘에 앉아계시면서
‘이 죄인들아, 회개하고 나에게까지 올라와 봐라!“
올라갈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직접 우리와 같이 진흙탕에 삐져서
허우적거리는 우리의 팔짱을 끼고 같이 끌고 나오신 겁니다.
눈높이 사랑, 강생의 사랑, 찾아나서는 사랑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특징입니다.
우리는 일생을 살면서 절대로 겪고 싶지 않는 방문이 있습니다.
첫 번째, 강도의 방문을 원치 않습니다.
두 번째, 빚쟁이의 방문을 원치 않습니다.
세 번째, 이유 없는 경찰의 방문을 원치 않습니다.
네 번째, 사이비 집단의 방문을 원치 않습니다.
반대로 하루에도 몇 번씩 겪고 싶은 방문자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의 방문을 원합니다.
두 번째는 천사의 방문을 원합니다.
세 번째는 신부님이 우리 집을 찾아오시는 방문을 원합니다.
개신교 쪽에서 쓰는 아름다운 단어가 있는데 ‘심방’
심방이라는 말뜻은 ‘축복을 주러 간다’ 입니다.
천주교에서는 방문이라는 말을 쓰지만
방문의 뜻은 빚쟁이가 찾아가는 것도 방문이고
보험회사 직원이 초인종 누르는 것도 방문입니다.
사탄의 하수인이 되는 분열을 일으키는 방문이 있습니다.
분열을 일으키는 방문의 대부분은 혓바닥을 다스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시길 ‘먼저 평화를 빌어주어라!’
어느 집에 가든지 무릎 꿇고 기도부터 해야 합니다.
“이집에 축복 내려 주시고, 제 입을 다스려 주시고, 제 입에서 나오는 말마다
축복의 말이 되게 해 주시고, 내가 이 집을 떠날 때는 기쁨의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우리 교우들은 이걸 잘 안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도가 없이 시작된 방문은
늘 그 모임이 끝나고 나면 상처받는 사람이 꼭 생깁니다.
남 얘기로 시작해서 남 얘기로 끝납니다.
입조심 하십시오.
어느 집에 가든지 아무리 바빠도 십자가 앞에서
성호경이라도 그으면서 기도하세요.
반대로 축복의 방문이 있습니다.
개신교 신자들이 여러분 집을 방문하는 모습은 어떻습니까?
제일 먼저 아무리 바빠도 현관에서라도 기도해 주지요?
“주님 이 종 여기 불러주셨으니 떠날 때는 평화의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이 집에 축복 주십시오.“
예수님의 유언을 지키는 사람들이 개신교 신자들이에요.
성서에 보면 천사가 아브라함의 집을 방문해서 이사악을 선물로 주셨어요.
예수님이 자캐오의 집에 가셔서 구원선포를 하셨어요.
‘이 집에 구원이 있으리라!’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를 방문하여 성령의 힘으로
구세주를 잉태할 것이라고 하는 엄청난 선물을 주셨습니다.
기도로 시작된 방문의 결과는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 치유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이제부터 이름으로 친지를 방문하고, 냉담자를 방문하고
교도소 수인들을 방문하고,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을 방문하십시오.
기도하고 방문한 결과, 상대편은 치유가 일어납니다.
두 번째로 기도하면서 이루어진 방문은 일치가 일어납니다.
기도하고 남을 방문하면 남의 이야기 하지 않기 때문에 일치가 됩니다.
세 번째 축복방문의 결과는 내적기쁨을 줍니다.
방문한 사람이나 방문을 받은 사람이나 같이 기쁩니다.
그분이 다녀가고 난 다음에는 늘 행복합니다.
어떤 이들은 ‘저사람 좀 안 왔으면 좋겠어~’
‘저 여자는 입만 열었다 하면 남 흉봐!’
‘저 형제 입에서 좋은 말 나오는 것 못 봤어.’
이제껏 살면서 나야말로 분열을 일으키는 일을 일삼았는지
아니면 축복을 주는 방문의 삶을 살았는지~ 한 번 뒤돌아봅시다.
오늘은 전교주일입니다.
전교는 한평생 해야 하는 하느님 앞의 부채입니다.
누군가의 전교로 내가 하느님을 알게 되었다면 그 은혜를 갚는 길은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을 하느님께로 이끌어오는 겁니다..
전교에 대한 출발점은 뭡니까?
내가 구원받았다고 하는 확신입니다.
열 명의 신자 가운데 여덟 명은 “여러분, 구원받았습니까?”
하고 물어보면 잘 모르겠대요.
조금 겸손한 척하는 사람은 “저 같은 인간이 어떻게 구원을 받아요?”
겸손과 분수를 구분을 못합니다.
여러분들 언제 구원받았어요?세례때 물과 성령으로 구원 받고
견진성사 때 성령칠은의 갑옷까지 입었어요.
개신교신자들은 꿈도 꾸지 못할 구원의 갑옷을 입었는데
머리끝에서 발가락까지 은총으로 코팅이 되어 있는 귀한 존재들인데
천주교신자들은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다보니 매사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지요.
나 자신도 구원받았는지 확신이 없다보니 전례생활도 소극적입니다.
봉헌생활도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는
하느님 앞에 맨 날 찌꺼기만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한 사람도 전교 못합니다.
그러나 이 죄인 구원해주셨다는 믿음이 있는 사람은
이 좋은 예수님을 안 알리고는 못 배깁니다.
예비자 모임에서 자기가 예비자에 들어온 동기를 이야기 하는 시간이었는데
어느 형제가 “신부님, 저는 성질이 나서 찾아왔습니다. 우리 사무실의 상사랑 한 사무실에서
15년째 같이 사는데, 그분 손에는 늘 묵주반지가 끼여 있고, 차에도 묵주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걸 보면 천주교 신자가 확실한데 그분이 한 번만이라도 한 번이라도 ‘성당가자~’
소리를 했으면 진작 나왔을 텐데~ 내 저 인간 성당가자 소리 기다리다
늙어죽을 것 같아 제 발로 찾아왔어요."
이게 바로 천주교 신자 모습이에요.
‘성당 가자’ 얘기 못한 그분은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겁니다.
여러분들, 구원 받은 것, 믿으십시오.
믿음은 전교의 출발점입니다.
‘나 구원받았어, 나 구원해준 예수님!’
그 다음으로는 표양전교가 따라야 됩니다.
이방인에게 손가락질당하면 안된다~ 이겁니다.
베드로 전서 2장 12절에
<이방인들 앞에서 행실을 단정히 하십시오.>
남편이 아직 신자가 아닌 자매들은 손들어 보십시오.
자매님 세례 받은 지 3년 되었는데 아직 남편이 성당 나갈 기미가 안 보여요?
세례 받지 않은 사람들을 성서적으로 이방인이라고 그래요.
표양전교가 중요합니다.
성당 안 나가는 남편이 아내를 보면서
“야, 내가 성당 나가려고 10년 전부터 벼르는데 성당 나가려고 할 때마다
너 난리 떠는 것 보면 천주교에 대한 애정이 싹 식어.“
이러면 안 된다 이겁니다. 반대가 되어야지요.
아내의 손을 잡고 “자기, 하니, 꿀~ 없는 집에 시집와서 시부모 모시고
고생 많다, 보답하는 길은 내가 빨리 신자 되어서 같이 성당 나가자!”
스토리가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표양전교 해야 되고, 다음으로는 신뢰심을 쌓게 해야 되고
기도전교와 말씀전교가 따라야 합니다.
나의 언변이 약하면 신부님들의 테입이나 책을 선물해야지요.
말씀전교, 기도전교, 다시 말하면 전교는 여러 가지로 해야 합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김웅열신부테입이 그중 낫다는 소문도 있어요.^^
외인 수십 명을 전교했는데도 자기 식구 한 사람 전교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약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쉽지 않습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좋은 표양을 보여야 합니다.
저희 집안은 구교가 아니고 철저한 유교집안이었습니다.
일 년에 수도 없이 제사를 지내던 종가집이었습니다.
그런 우리 집안에 은인이 나타났는데 엄마 친구가
종가집 맏며느리인 우리 엄마를 성당으로 끌어내었어요.
긴 세월이 지니고 난 다음에 그 엄하던 유교집안은 친가, 외가 할 것 없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 천주교신자가 되었어요.
우리 집만 하더라도 장남이고 종손인 내가 사제가 되었고,
셋째 동생이 사제가 되어 지금 일본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있어요.
애초의 시작은 그 마리아 아줌마, 시작은 미미하지만 결과는 창대했어요.
여러분들도 그런 사명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세요.
전교는 선택이 아니라 거룩한 의무입니다.
이 배티 골에 15개의 비밀교우촌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이곳에 왜 왔겠습니까?
오로지 하느님을 위해 모든 것 포기하고
수계생활에 철저하면서 전교생활에 목숨까지 바쳤어요.
이곳은 순교자의 본향입니다.
수많은 선배신앙인들의 뼈와 피가 묻혀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하늘로 쭉쭉 뻗어 있는 이 적송은
무명순교자들의 혼이 솟아난 것이 아닐까!
오늘 전교주일에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고 이곳에 왔습니다.
오늘 받은 은혜로 죽기 전에 내 표양과 기도로
몇 영혼이라도 전교할 수 있는 그 힘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아멘
느티나무신부님(2010. 10. 24 전교주일) 글